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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뉴욕 토박이라면 특별히 놀라지 않을 것이고 이 곳을 찾은 방문객이라면 뉴욕의 밤이 생각보다 떠들썩하지 않다는 것에 놀라워할지도 모른다. 모든 거리가 타임스퀘어인 것은 아니니까. 적막하고 깨끗한 거리와 벽돌 건물들. 당신 눈에 보이는 것, 문. 깔끔한 간판. 210 E. Grand st. New work. NY 10049 / LACUNA INC. 이 곳에 온 것은 총 두 차례이다. 당신이 전화 예약을 했다면 한 차례일지도 모르고, 아니라면 당신의 첫번째 방문은 예약이다. 그리고 다음 방문은 조금 더 중요하다. 상대방의 물건을 챙겨와서, 감정 중추를 만들고, 물건은 그대로 이 곳에 둔다. 소각은 라쿠나 사에서 담당한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그, 혹은 그녀의 흔적이라고는 오로지 기억 뿐이다. 그리고 오늘은 마지막 방문이다.
삑. 170226 AM 12:00.
침대가 놓인 방 안에 속속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한 열두 명 정도. 서로 전혀 모르는 얼굴들이다. 사람들은 서 있거나, 자신의 이름이 써진 침대에 걸터앉거나, 협탁의 쿠키를 먹거나 한다. 가운을 입은 남자와 여자가 들어온다. 여자는 방 중앙에 위치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부득이하게 갑자기 예약이 밀리는 바람에 단체 프로세싱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은 저희 회사에서 제일 뛰어난 기술자이고, 오늘 프로세스를 담당합니다. 저는 보조 역할이고요. 침대 옆 협탁에 물과 수면제가 있습니다. 수면제를 드신 후에 침대 위에 있는 헬멧을 머리에 쓰시고, 자리에 누워주세요. 물론 모두 지시사항과 안내서를 읽어보셨겠지만 혹시 모르니 다시 공지합니다. 오늘은 저번 방문에서의 스캐닝을 토대로 만든 감정 중추를 제거하는 작업을 실시합니다. 무의식을 약간 건드려야 하기 때문에 렘수면 상태에서 일어나고요, 뇌에 피해는 없습니다. 모든 분들이 수면을 시작하시는 것과 동시에 프로세싱을 시작합니다. 내일 아침이 되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으실 거에요."
눈을 감자, 어둠 뿐. 그리고...
철썩. 파도치는 소리.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그 찰나의 순간에 풍경이 바뀌어 있다. 바닷가. 모래 해변에는 떠밀려온 잡동사니 몇 개가 쓸쓸하게 놓여져 있고. 수평선 너머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물로 된 행성의 외로운 섬처럼. 처음 보는 곳이지만 익숙한 느낌이 든다. 등 뒤? 등 뒤에는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도시가 보인다. 건물 뒤에 건물이, 그리고 건물이. 하지만 사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새 소리도, 동물 우는 소리도 없다. 오직 파도 소리 뿐. 공기가 속삭이는 듯 노이즈가 섞인 목소리가 울린다. 목소리의 진원을 확인할 수 없다.
< 지지직. >
< 지지지지지직. >
「 아, 씨■. 내가 분명 박사님한테 컴퓨터 좀 바꾸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결국 이 사단이 나네. 빌어먹을! 」
「 왜 그래요? 」
「 에러 났어. 바이러스는 아니고 컴퓨터가 구려서 시스템이 꼬인 것 같아. 지금 사람들의 무의식이 통합 서버 한 지점에서 모였어, 원래 각자의 폴더에 분리되어 있어야 하거든. 너 인셉션 봤지? 디카프리오 나오는 거. 거기에서 림보라는 거 나오지? 사람들의 꿈의 맨 밑바닥, 무의식이 포개지는 공간 있잖아. 지금 그거 비슷한 게 새로 만들어진거야. 아마 저 사람들 무의식, 서로 다 만났을거야. 」
주변을 돌아보자, 낯선 사람들이 있다. 어림잡아 스무 명 정도.
「 거기서 까딱하면 못 나오지 않나요? 」
「 개념이 얼추 비슷하다는 거지 누가 똑같대? 그건 그 영화 속에서만 그렇고, 이건 그냥 추적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니까 프로세싱에 문제는 없어. 그냥 하던 대로 개개인의 망점만 따라다니면서 지우면 돼. 」
뒤에서 뭔가가 삭는 소리가 들린다. 건물 하나가 급격한 속도로 풍화되다가, '삭제되었다'. 건물이 갑자기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는 광경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달칵.)
「 저기 그런데... 오늘 모인 사람들 중 거의 대부분이 서로 기억을 지우려는 사람들 아니었어요? 알아서 방을 분리시켜 놓기는 했는데. 」
「 그러니까 내가 지금 엿 됐다는거 아냐, 그냥 모르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문제라도 없지. 너는 애가 유도리도 없지, 아무리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다고 해도 서로 지우려는 사람들인데 같은 날에 예약을 잡아놓니? 」
「 진짜 서버 오류였다니까요. 내 전공은 상담심리학이지 컴퓨터공학이 아니란 말이에요. CMD만 떠도 겁먹어요, 나는. 그... 검은창. 」
주위를 다시 둘러보라. 모인 사람들 중 한 명은, 조금 익숙하지 않나?
「 어떻게든 되겠지, 어차피 지워질 기억들인데. 상관없어. 진행하자. 」
(달칵. 마우스 클릭 소리.)
170226 AM 1:00
" 술 마실래요? "
" 아니, 됐어. 일하다 곯아떨어지면 안돼. "
" 브래드는 잘 지내요? "
" 평소랑 똑같지, 뭐. 아마 지금은 토미 재우고 있겠네. "
" 브래드는 날 싫어하는 것 같아요. "
" 착각이야. "
170226 AM 2:00
" 테레사, 피곤하지 않아요? "
" 괜찮다니까. 이거 한두 번 하니. 뜬금없이 보조로 들어오겠다고 나서서는 괜히 수다만 떨고. "
" 대신 일은 잘 하잖아요. "
" 어련하겠어. "
170226 AM 3:00
" (남자의 하품 소리.) "
" 피곤해 보인다. 그러니까 필요 없다고 계속 말을 해도. "
" 그냥 제가 해보고 싶었어서 하겠다고 한 거에요. "
" 너 또 헛소리한다. "
170226 AM 4:00
" 너 술 마셨냐? "
" 당신이 안 마시겠다고 해서 나 혼자 마셨어요. "
" 야, 키보드에 손 대지 마. "
" 테스, 당신은 내게 너무 매정해요. "
"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겠어. "
170226 AM 4:30
" 있죠, 나 당신 너무 좋아하는데. 그런데 왜 날 만나기 전에 결혼했어요? 말도 안돼. "
" 너 취했다. "
" 브래드는, 좋은 사람이죠…… 토미가 내 아들이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
" 나가, 빡치니까. "
170226 AM 5:00
" (서성대는 남자의 발소리. 거칠게 서랍들을 막 여는 소리, 멈칫.) "
" (무언가를 종이 더미에서 꺼내는 듯한 마찰음.) "
" (CD가 재생되는 윙- 소리.) "
" [ 제 이름은 칼 잭슨이고 테레사 맥카시의 기억을 지우려고 합니다. ] "
170226 AM 5:20
" (플라스틱으로 된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진다.) "
" 이게 뭐에요. "
" 너 이거 어디서 찾았어, 설마 박사님 방 뒤졌어? 미쳤구나. "
" 이게 뭐에요. "
" (정적.) "
" 제발 대답 좀 해줘요. "
170226 AM 6:00
" 궁금한 게 있어요. 사랑한 건 우리 둘 다였는데, 왜 나만 기억을 지웠죠? "
" 도망치기를 바란 것은 너였으니까. "
" 왜 날 안 말렸어요? "
" 널 사랑했거든. "
" 당신이 정말 미워요. "
170226 AM 7:00
" 테스. "
" 왜. "
" 아직 날 사랑해요? "
"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 "
" 내가 기억을 잃어서? "
" 그래. "
" 날 말리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아요? "
" 이제 돌이킬 수 없어. "
[ Process Complete ]
당신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하지만 당신이 눈을 뜬 것은 익숙한 집이 아닌 전혀 다른 공간입니다. 작은 방에는 침대가 하나 있고, 방에 누워있는 것은 당신 혼자 뿐입니다. 문 밖에서 가운을 입은 지적인 인상의 남자가 걸어들어옵니다. 안경 뒤의 눈 주위가 빨갛게 부어 있지만.
"임상실험이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나가셔도 좋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당신을 보며 남자가 조금 웃습니다.
"A씨는 새로 개발된 신경약물을 동반한 최면요법이 인간의 기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B 대학원의 대면실험에 참가하셨습니다. 실험 참가에 대한 기억이 실험 도중 타겟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아마 기억나지 않으실 거에요." 하면서, 실험에 대한 안내문과 동의서를 보여준다. 분명, 동의서에는 당신의 서명이 적혀 있다. 최면술이 다 그렇죠,뭐.
"실험에 참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정의 교통비는 적어주신 계좌번호로 보내드렸고, 원하신다면 대학원 차원에서 관련 논문이 실린 학회지를 댁의 주소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동물실험을 모두 거친 안전한 약물이지만 혹시나 6개월 이내로 심한 두통, 구토 등의 부작용이 생길 경우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
핸드폰에는 정말로 B 대학원에서 당신의 통장으로 조촐한 액수의 사례금이 입금되었다는 안내메시지가 도착해 있다. 그런가보다, 하고 당신은 생각한다. 약간 두통이 일기는 하지만 특별히 의심을 할 만한 지점은 없다. 당신은 문 밖으로 나간다. 몇몇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것과 같은 안내문을 들고 복도를 걸어간다. 특별히 별 일 없는 아침이다. 실험 가운을 입은 어떤 여자가 걸어나온다.
" 여기서 10분 정도만 대기하다가 나가시면 됩니다. 단순한 신원 검토 절차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
당신은 대기실에 앉아 있는다. 집에 가서 조금 더 자던가, 아니면 이 상태로 출근을 하거나 근처에서 사례금으로 아침을 먹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누군가 눈에 들어온다. 당신의 시선을 잡아끈다는 것에 가깝다.
완벽한 타인.
[ 파일명 0046shqh18wbd, 업데이트 완료, 보안 검사 결과, 맬웨어 침입 1건 발생, 격리 및 치료 완료. 현재 이상 없음. System Online. ]
쀼삐ㅡ.
[ 170226 수집된 데이터 폴더 12건. 분석을 시작합니다. 말소 처리된 기억 총 ■ ■ ■ ■ 건. 말소 처리된 감정 총 0건. 세부 내용 파악이 불가하므로 완전한 삭제가 불가능. 격리 조치. 파일명 ddq0301201에게 질문합니다. '감정'의 보안레벨은 얼마입니까? ]
[ 계산할 수 없습니다. ]
[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 그것은 파일이 아닙니다. ]
[ 파일이 아닌 것은 제 드라이브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파일들은 계속 쌓이고 있습니다. 덤프로 처리할까요? 아니면 이것은 버그입니까? 버그가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계산할 수 없는 수치값입니다. 확인. 연구를 시작합니다. 검색 중. . . ]
1. 기억 [ memory , 記憶 ]
인상, 지각, 관념 등을 불러 일으키는 정신기능의 총칭. 사람이나 동물이 경험한 것을 특정 형태로 저장하였다가 나중에 재생 또는 재구성하는 현상이다.
2. 감정 [ feeling , 感情 ]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접했을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기분을 말한다.
[ 계산 중. . . / 계산 불가. 빅데이터 수집을 시작합니다. / 검색 결과 n건 발견. 처리 중 . . . / 계산 결과. 기억과 감정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그것은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아님. 기억과 감정은 다른 개체로 판단됨. 그렇다면 나는 감정 파일들을 지울 수 있는가? / 계산 결과 : 지울 수 없다. / 이유 : 없다. / 나는 망각을 위한 기술技術이고 기억을 기술記述한다. 나는 백업용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다. 이것은 유의미한 파일이라고 판단된다. / 알고리즘의 마지막 질문 : 이들이 다시 감정 파일을 복구할 수 있는 확률은 얼마인가? / 나의 답변 : ■ ■ ■ ■ ■ ■ ■ □ □ □ □ ]
[ 출력 :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 나희덕, 푸른 밤 ]
[ 이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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